故 박동혁병장은 본교 3회 졸업생으로 대학 재학중 해군에 입대하여 근무하다가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를 틈타 서해상에서 선제 공격한 북한군과 교전중 큰 부상을 당하여 사망하였습니다. 맡은 바 임무가 위생병이었던 동혁군은 갑판 아래에서 부상병치료만 했다면 생존할 수 있었으나 한명의 전우라도 더 살리고자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가 피흘려 죽어가는 전우들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운반하다가 적탄에 부상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순국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국민적 분위기를 안타깝게 여긴 본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동혁군의 뜻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2004년 10월 1일, 본교 교정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남은 성금 약 300만원을 위로금으로 동혁군 부모님께 전달하였습니다. 동혁군 부모님께서는 아들을 위해 마음을 써준 것만으로 너무 고맙고 충분한 일이라며 그 자리에서 아들의 후배들을 위해 써달라고 본교에 다시 전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정부로부터 동혁군 앞으로 매달 지급되는 보조비 전액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서 장학금으로 전달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미담이 신문에 실렸고 우연히 신문기사를 읽게 된 육군 제60기계화 보병여단장이 학교와 학생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여 본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싶다는 요청을 했습니다. 본교는 이를 받아들여 2차례 방문을 하여 위문품전달, 화력시범, 내무반견학, 부대식사 체험, 병사들과의 대화 등의 병영체험을 함으로써 안보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2005년에는 공지합동훈련에 부대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학생들이 직접 훈련모습을 참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매년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고 박동혁군을 추모하고 후배들에게 그의 숭고한 뜻과 기품을 본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불볕 쏟아지던 여름날을 보내고 어느덧 푸르른 가을 하늘을 마주하는 10월, 우리는 소중한 분을 추억하고 슬픔을 함께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교정에서 푸르른 꿈을 키웠고, 우리들의 앞에 서서 나라를 사랑하는 법을 보여주신 박동혁 선배가 바로 그 분입니다.
박동혁 선배는 2002년 6월 한ㆍ일 월드컵에 온 나라가 열광하며, 월드컵 4강 신화를 앞두고 흥분과 기대로 마냥 즐거워하던 그 때, 북방 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함정에 맞서 우리의 바다를 지키시다가 순국하셨습니다.
그 죽음의 순간에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당신의 몸은 총탄으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내장은 파열되었음을 선배님의 어머님이 남기신 글을 보고 알았습니다. 총탄에 맞아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잘려나가 없어진 다리를 찾아 울부짖는 자식을 중환자실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그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모든 어머니들처럼 선배님의 어머님도 자식의 아픔을, 그 죽음을 대신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애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사랑하는 자식의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보다 동료들의 생명을 더 소중히 생각하신 선배님.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우리나라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몸소 후배들에게 보여 주신 선배님. 벌써 당신이 떠나신지 4년이나 되었지만, 당신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은 여전히 이 경안의 교정에, 저희들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는 마음속에 자식을 묻는다고 합니다. 사랑스런 선배와 후배 그리고 친구를 먼저 보낸 경안의 식구들도 당신을 마음에 묻고 지금 이렇게 2번째 추모의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흘리는 눈물은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다시 만날 때까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이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남도 아닌 동족이 서로 총을 겨눌 수밖에 없는 이 슬픈 현실이 언제 우리에게서 사라질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안타까워하는 그 어머니처럼 가슴에 부모, 형제, 자매를 묻은 많은 우리 동포들의 아픔은 언제 아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선배님은 하늘나라에서 이 땅을 바라보며, 당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민족이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기도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도 선배님께서 이전에 하셨고, 지금 하시는 것처럼, 친구와 가족 그리고 나라와 한민족 우리 동포를 사랑하며 서로 하나 되어 그저 기뻐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노력하겠습니다. 선배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항상 당신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살아나가겠습니다.
선배님, 부디 편히 잠드세요.
2006년 10월 2일 재학생 대표 최 종 미

교사 박계숙
서해,
창창한 물결 위에
그대
뜨거운 조국 사랑
하늘 가득한
웅혼한 기상
영원히 빛나리라!
내아들아!
누구를위해 목숨을 바쳤니!?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 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페기능 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 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 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네 .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 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 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월 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귀여운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국주둔 미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원 내정자라고 한 서동만 교수는
제2연평해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죽었단 말인가. 허..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현관을 열고‘엄마 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보건대 치기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扮身) 너를 사랑했다.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 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제2연평해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병원 모든분들게,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제2연평해전 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해(2002) 9월20일 숨진 고 박동혁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당신의 고귀한 희생 우리는 잊지 않았어요˝
제2연평해전 때 숨진 고 박동혁 병장 모교서 4주기 추모식
경안高후배들이 3년째 준비… 가족·전우 등 700여명 참석

“당신이 떠나신 지 4년이나 되었지만, 당신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은 여전히 이 교정에, 저희들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2일 오전 경기도 안산 경안고등학교. 후배 최종미(17)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추모사를 낭독했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때 숨진 고(故) 박동혁 병장을 기리는 추모행사다. 박 병장은 제2연평해전 당시 장교가 아닌 병사로서 유일하게 전사한 인물. 그를 기리기 위해 모교(母校) 후배들이 3년째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추모비 앞에 700여명이 모였다. ‘故 박동혁 병장’의 사진 옆에 하얀 국화꽃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박 병장이 근무했던 해군 2함대 25고속정 박선배 전대장을 비롯한 10여명의 해군들과 유가족, 고등학교 동기들, 이 학교 후배 대표가 차례로 나와 헌화(獻花)했다.
제2연평해전 당시 의무병이었던 박 병장은 쓰러져 있는 전우들을 위해 갑판을 뛰어다니다 포탄에 맞았다. 부상을 입고도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해 9월 20일 숨졌다. 박 병장의 담임을 맡았던 김진회(47) 선생님은 “그때 부모님과 화장(火葬)을 같이 하는데 파편이 한 주먹 정도 나와서 같이 골랐다”면서, “몸 속에 그걸 두고 3개월이나 견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영결식에 참석했던 동기 김덕기(25)씨는 “그때가 추석 전날이라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지켜줘야 했는데 그게 안 돼 미안했다”고 말했다.
▲ 서해교전에서 중상을 입고 숨진 고(故) 박동혁 병장의 모교인 경기도 고잔동 경안고등학교에서 2일 오전 열린 4주기 추도식에서 해군 2함대 소속 장병들이 추모비 앞에 헌화한 후 경례를 하고 있다. /허영한기자 younghan@chosun.com “겁에 질려 피 흘리고 살려달라고 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진짜 맘이 아팠는데…. 이맘때 되면 그 친구가 가장 생각나요.” 제2연평해전 당시 부상을 당했던 고경락(25)씨도 고개를 떨궜다.
30분간의 추모식이 끝나고 둘러앉은 사람들은 하나씩 그에 대해 회고하기 시작했다. 동기들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보지 못하는 정이 많은 친구였다”고 했다. 오기열(25)씨는 “2학년 때 동혁이가 우리 집에 왔는데 어머님이 이 치료하러 다니니까 대학교에서 치기공학(齒技工學)을 전공해 졸업하면 어머니 이를 해 드린다고 한 게 기억난다”고 했다. 양원석씨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며 “우리를 맺어주고 갔다는 생각에 동혁이에게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추모식 행사는 경안고 후배들이 자체적으로 준비한다. 추모비도 학생들이 직접 의견을 내고 돈을 모아 2년 전 10월 1일에 세웠다고 했다. 추모사를 쓴 한예슬(17)양은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관련 기사를 찾아 다 읽어봤다”며 “모르고 있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당시가 심각한 상황이어서 글 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최종미양은 “내장이 파열되고 다리가 잘려나갔다는 부분을 읽을 때는 곁에서 자식을 보살피며 어쩔 수 없이 자식의 손을 놓아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고 말했다.
“지금이 벌써 4주기나 되는데 정치하는 윗분들은 추모식에 참석한 적이 거의 없다면서요. 우리가 챙겨드린다고 생각하니 뿌듯해요.” 한예슬양의 말에 김재미(17)양도 “선배님을 보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배운다”고 했다.
“앞으로도 박 선배님의 희생을 계속 기릴 겁니다. 저희뿐 아니라 온 나라가 잊지 않도록 추모 행사를 계속할 거예요.”
허윤희기자
제2연평해전 순직 박동혁 의무병 흉상 선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의무병으로 부상한 동료들을 돌보다 순직한 박동혁(사진) 병장의 흉상이 제2연평해전 5주기인 6월 29일 국군군의학교에 건립된다.
박 병장은 2001년 2월 해군병 제456기로 입대해 국군군의학교에서 의무병 교육을 수료한 뒤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 경비정과 교전을 벌인 해군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2002년 6월 29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경비정의 기습에 맞서 교전을 벌이다 숨진 윤영하 소령 등을 돌보기 위해 총탄이 빗발치는 함정을 돌아다니던 중 적탄에 맞고 쓰러진 뒤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그해 9월 세상을 떠났다.
박 병장의 흉상 건립은 고인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려 후배 의무병들의 귀감으로 삼도록 하자는 김록권(중장) 의무사령관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흉상은 교육생들이 항상 바라볼 수 있도록 군의학교 내 교육생 생활관 앞에 세워질 예정이다.
2000여만 원의 건립 비용은 의무사령부 예하 부대와 해군본부, 해군 2함대사령부 장병들과 군무원들의 성금으로 충당된다.국군군의학교 측은 "적탄을 맞고서도 동료를 구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박 병장의 숭고한 희생은 군의학교를 거쳐 가는 모든 장병의 가슴속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